인간의 영혼에 대한 배려를 최대의 관심사로 생각했던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삶을 면밀히 관찰하고 시대의 간극(間隙)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사유하며 그 일에 일생을 소모하였다. 페리클레스 치하의 아테네는 부강했고 안전했으므로 소크라테스는 별다른 탄압에 부딪히지 않고 단지 "귀찮은 존재"로 자신의 소명(召命)을 실천할 수 있었다. 인간의 즉흥적인 행위의 근저에 확고부동하고 영원한 도덕적 질서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소크라테스의 외침은 소피스트들에게 염증을 느끼던 아테네 인들 사이에 짜증스럽고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고, 이율배반(二律背反)에 빠진 지식인이라는 평판이 주어졌었다.
보다 사태를 악화시킨 것은 많은 아테네 인들이 이미 논의가 끝난 것이라고 생각했던 문제에 대해 집요하게 사유했던 그의 태도였다. 그러나 당시 아테네의 경제력 및 군사적 위치는 막강했고 패배를 모르던 시기였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를 제거할 사회적 필요성은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명문 출신의 젊은이들 사이에 변증술(dialectics : 도덕, 종교, 정치적 행위와 관습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기술)을 유포시킴으로써 소크라테스는 오래 전부터 의심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아테네가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기 전까지는 거의 특별한 제재(制裁)를 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었으며, 확실한 위험으로 간주되지도 않았다.
결국 스파르타와의 전쟁에 관련된 일련의 사건이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법정에 서게 하였고, 사형 선고를 받게 하는 데 결정적인 사항이 되었다. 그를 그렇게 끌고 이끌어간 직접적인 사건은 알키비아데스의 반역 행위였다. 그는 소크라테스를 흠모했던 인물 중 한 사람이었으며, 스스로 소크라테스의 제자임을 자처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타로 건너가 스파르타 전략가들에게 전쟁에 관한 여러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으므로, 많은 아테네 인들은 알키비아데스의 그러한 행위의 배후에 소크라테스도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을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를 감정적으로 배척하게 되었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속해 있던 오백 인의 원로원 위원회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기에, 아르기누세 군도 해전에서 태만죄로 기소된 여덟 명의 군지휘관을 재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전투에서 아테네는 승리하였으나, 작전 지연으로 인해 25척의 전함과 4000명의 병사를 잃는 참담한 승리에 불과하였기에 그 소모전을 지휘했던 지휘관을 재판에 회부하여야 한다고 강력한 여론이 형성되었다. 그러한 여론은 더욱이 그들의 범죄 사실도 개별적인 사항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한 번의 표결에 의해 확정해야 한다고 요구하였고, 그렇게 결정되고 말았는데, 소크라테스만이 끝까지 그것은 정상적인 법 절차에 위배된다고 그 조치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들에 관한 재판은 소크라테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정되어 모두에게 유죄 판결 및 6명의 지휘관을 사형에 처하는 것으로 종결되고 말았다.(BC 406년과 404년 사이)
또 하나의 사건은, 아테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스파르타의 요구에 의해 아테네에 새로운 정부 구성을 위한 입법위원회가 소집되었는데, 이 위원회는 오히려 폭력적 과두 체제를 형성해 자의적으로 페리클레스의 민주정부의 핵심 인물들을 숙청하고, 개인적 용도로 많은 부정한 축재(蓄財)를 일삼는 전횡을 행사하였다. 결국 위원회는 무력에 의해 와해되고 말았는데, 이것이 소크라테스를 더욱 곤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 혁명적 위원회의 구성원 중 몇 명, 특히 크리티아스(Critias)와 카르미데스(Charmides)가 소크라테스의 친한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결국 알키비아데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에게 반역자들과 내통했거나 제휴하였다는 혐의를 갖게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이유들로 인해, 이제 짜증은 불신으로 발전했고, 결국 기원전 400 - 399년에 소크라테스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디오게네스 라에티우스(Diogenes Laertius)는 소크라테스를 1) 국가가 숭배하는 신(神)들을 숭배하지 않고 새롭고도 기이한 종교 의식을 유포한 죄. 2) 젊은이들을 정신적, 윤리적으로 오염시킨 죄로 기소하여 사형을 요구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기소되었을 때 곧바로 망명할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테네에 남아 배심원이 500명이나 되는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길을 선택했다. 이 재판 과정에 관한 것이 플라톤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변명』이라는 책의 내용이며,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행위와 활동에 대한 변호를 비교적 훌륭하게 수행하면서 자신을 기소하는 동기들에 대해 강력하게 통박하는 변론을 면밀하게 주도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은 아테네를 위해 많은 것을 헌신했으며, 더욱이 자신의 명예로운 군복무와 여덟 명의 지휘관의 재판에서 정상적인 법적 절차를 주장했던 그의 행동이 옳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점을 거듭 주장하였다. 그의 자기 자신에 대한 변호는 전형적인 논증으로, 이는 전적으로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500명의 배심원은 그를 유죄로 표결하였으며, 그 표결이 있는 후, 형량을 정하기 위한 피고의 진술이 허용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죄를 너무나 명백히 확신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삶의 지침과 가르침이 아테네 인들에게 기여했던 위대한 가치에 해당하는 마땅한 대우를 요구했고, 그가 요구하였던 것은 "영빈관에서의 공식적 접대"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자신의 삶을 "올림픽 경마 경기나 전차 경기에서 승리한" 사람을 비유하면서 "그 사람은 단지 당신들을 행복해 보이도록 했을 뿐이지만, 나는 실제로 당신들을 행복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적이 탁월한 인물이나, 승리한 장군, 또는 올림픽 승리자들에게 베풀어지는 영빈관에서의 공식적 접대야말로 자신이 받을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진실한 의미에서 진정한 가치를 아테네에 세운 자(者)에 대한 대접이라고 변론하였다. 그의 오만함에 오히려 모욕을 당했다고 느낀 배심원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소크라테스는 국외로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거듭되는 지우(知友)와 제자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그의 아내와 어린 자식들에게 관심을 갖게 하여 배심원의 감정을 움직이자는 의견을 거부하며 인간 영혼(psyche)의 이성적 능력을 최후까지 신뢰했던 그도 감옥에서 어린 자식들을 생각해야 한다는 크리톤의 간청에 동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자신이 몸소 가르친 바를 위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언제나 어디서나 진리 앞에서 갈팡질팡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던 자신의 신념을 지키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소크라테스에게, 탈출이란 아테네와 아테네의 법률 절차를 위배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러므로 과녁은 명중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법률은 그의 재판과 판결에 아무 책임도 없다. 잘못된 것은 사람이며, 그를 고발한 아니토스(Anytos)와 멜레토스(Meletos)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법정의 선고에 따르는 것으로, 법률과 그 절차에 대해 자신의 경외심을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의 임종 순간을, 플라톤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몸을 한번 더 만져 보고서 약기운이 심장에까지 오게 되면 그 때는 떠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의 몸이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s : 의술의 신)에게 닭 한 마리를 빚지고 있는데, 꼭 갚아주게나.' 이것이 최후였다. 이것이 우리들의 친구, 우리들이 그 때까지 알아온 사람들 중 가장 훌륭했고, 가장 지혜로웠으며 정의로웠던 한 인간의 최후였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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